물맞이 계곡에 흐르는 자연의 선율 따라


물맞이 계곡에 흐르는 자연의 선율 따라
이동식목사

오랫동안 가물어 마른  먼지가 날리던 6월의 어느 해질녘, 물맞이 골 기슭으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바람도 쉬어 가는 듯 사방이 뚫린 정자에는 어느 새 산그늘이 내려와 하루네 지친 그림자도 쉬어가는 듯합니다.
솔숲 사이에는 생명을 주듯 은은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낭랑한 음색으로 시가 낭송됩니다.
때 마쳐 불어오는 솔바람에 모두가 하나 되어 음악의 선율과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에 마음을 실어봅니다.
 삶의 애환과 고백을 담은 절제된 언어는 진한 감동이 되어 가슴을 울립니다. 자연과 시와 음악이 만나 하나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낭독의 재발견’을 통해 역시 눈으로 읽는 글보다 낭독의 위력을 공감 한바 있지만 고요한 계곡을 울리는 감동은 더욱 힘 있게 다가옵니다.
우리 고장의 유일한 계곡, 실제로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다가 간혹 비가 내리면 메마른 절벽에 폭포가 생기고 계곡물이 흐릅니다. 폭포도 물이 없으면 절벽이 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오랜 가뭄에 물은  마르고 없지만 지금 시가 흐르고 음악이 흘러 메마른 영혼을 시원하게 적셔 주고 있습니다. 
 ‘물맞이골’은 더운 날이면 이곳을 가끔 찾으면서 흥얼거리는 동요가 있습니다. 윤석중님이 작시하고 홍난파님이 작곡한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중국 사람들은 기차의 플랫폼을 월대라고 합니다. 마치 둥글게 떠오르는 커다란 달을 맞이하던 높다란 월출봉 산봉우리(月臺)에 올라서듯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언가 만날 것 같은 기대로 찾은 동심(童心)이 있습니다.
물맞이 계곡의 뜻을 고증이나 학문적인 진실은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시원한 물줄기를 기대하며 달맞이하듯 기다리던 간절함의 현장이었든지, 또는 힘든 노동으로 생긴 근육통을 풀어주는 폭포였을 것입니다. 아낙네들의 웃음소리와 초동들의 물장구소리 대신 지금은 음악과 시가 흐릅니다. 지역 문인(詩人)들이 마련한 “음악이 있는 시 낭송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전파를 감지하는 레이더 같은 감각이 발달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흐르는 시간도 느끼는 감흥도 시라는 향기합에 담아 보관하는 마술사입니다.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그냥 스쳐지나가는 몸짓에 불과한 것들에게 이름을 불러주므로 의미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시인은 생각하게 만듭니다. 잃어버린 추억을, 잠자던 무딘 감각을 살아나게 합니다.
낭송 된 시 중 손수진님의 시 “불면” 에서 ‘장미인줄 알고 사다가 심은 나무에 장미가 아닌 찔레꽃이 핀 걸 보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불면(不眠) // 새들도 집으로 돌아가 깊이 잠든 밤 / 한 시와 두 시 사이 / 달빛 가득한 마당에 내려서며 / 비로소 보이는 소리, 소리들 / 베베 몸을 꼬는 타레난초 몸 터는 소리 / 다육이 화분에 오종종 / 탱탱하게 몸 부풀리는 생명, 생명들 / 그 길을 유유자적 건너고 있는 / 민달팽이 한 마리 / 마당 한 귀퉁이 / 장미인줄 알고 사다 심은 나무에 / 환하게 찔레꽃이 피었다 / 찔레여서 더욱 애잔한 / 제 몸에 가시울타리를 치고서도 결코 숨길 수 없는 / 향기의 절정 / 어린 날 하얀 찔레꽃을 머리에 꽂고 나간 고모는 /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 불면의 밤 / 한 시와 두 시 사이에 / 나무의자에 앉아서 나는 본다 / 그리고 묻지 않기로 한다 / 왜, 월담을 해서 내 집 울타리 안에서 / 저토록 아찔한 향기를 피우고 있는지를.”
그날 밤 불면증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모두 잠든 고요한 밤에 밖으로 나와서 본 세상에는 또다른 찬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도무지 볼 수없는 신비한 세상이었고 보물이었습니다. 양손에 가득 움켜쥐고도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부끄러운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유월의 해가 미련 없이 떠나버린 어두워진 계곡에 남아 소중한 오늘의 끝자락을 잡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