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나그네
이 동 식
높아진 하늘가로 웃음을 머금은 새털구름은 슬그머니 다가온 가을 잎새를 붉게 물들입니다. 원색으로 채색되어가는 대지 위로는 이슬처럼 투명한 가을이 내립니다.
작은 물방울 되어 잎새에 흐르는 여름의 남은 눈물은 조용한 가을바람에 반짝거립니다.
뜨거운 열기로 데워졌던 대지는 어느새 찬 기운을 품고 낙엽의 옷을 덮으려 합니다.
활처럼 휘어진 가지에는 계절이 남기고 간 열매가 익어갑니다. 사람은 늘 지나간 추억을 먹고 삽니다. 오늘은 과거의 흔적이며 결과입니다. 가까운 도심에서는 타임머신을 돌리며 7080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퍼포먼스가 열립니다. 거기에는 아직도 체온이 느껴지는 거룩한 이력서가 되어 첨부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은 깊은 땅 속에서 지나간 사람들이 남기고 떠난 유물과 흔적을 찾아냅니다. 그 흔적에서 옛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합니다. 수사관은 범행의 흔적을 통해 범인과 그 동기를 찾아냅니다.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의 나이를 알게 됩니다. 또한 식물학자들은 그 나이테의 간격과 목질강도를 통해 지나온 기간 동안 혹한과 가뭄의 환경과 기후의 상태까지 찾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나이테는 세월을 몸으로 남긴 아름다운 싸인 입니다.
나비처럼 하늘거리는 발레리나의 그 아름다운 몸짓 속에 감춰진 슈즈 속 굳어진 발처럼 아름다운 이면에도 각고의 흔적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함 뒤에는 굵게 마디진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이 겹쳐 있음 같이 가을의 풍요와 낙엽은 지난날의 거룩한 흔적입니다.
이미 가까이 도착한 가을이란 손님 앞에 깜짝 놀라 이제야 정신을 차리며 미안한 마음으로 가을을 만나려 뒷산에 올랐습니다. 넥타이를 맨 체로 구두를 신고 어색하게 숨을 몰아쉬며 준비 없이 오르는 거친 산길에는 벌써 가을을 가득 가슴에 담고 땀에 젖어 내려오는 등산객들의 어깨가 저물어가는 오후햇살에 쓸쓸히 느껴집니다. 어제 노회에서는 전장에서 돌아온 노병의 전역장 같이 지난 40여년 간 목회(牧會)를 마치고 목회현장를 떠나시는 한 선배님의 은퇴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은퇴하게 됨의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노 목사님의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몇분 뒤 새로운 꿈을 꾸며 사역현장을 향해 출발하는 새로 안수 받는 목사의 안수식이 열렸습니다. 떠나는 사람들과 찾아오는 사람들, 마치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과 승차하는 사람이 아무 생각없이 마주치고 동일한 장소를 무의식으로 지나치지만 떠나는 자의 거룩한 모습을 낙엽과 열매에서 배우게 되는 등반이었습니다. 가을로 가는 산길에서 정상만 바라보며 오르는 거친 숨소리가 어느 새 지친 어깨로 정복했던 모든 것을 미련없이 포기하고 내려오는 쓸쓸함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힘이 들어간 긴장되고 굳어진 출발선과 달리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결승선의 지혜를 배우고 싶습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에게 쉼 없이 말하는 듯 합니다. 가을의 교차로에는 의미 있는 교행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새 생명의 탄생으로 행복한 기쁨과 웃음소리 가득한 산실(産室)이 있다면 한편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 그를 보내는 슬픈 눈물의 장례식장이 한 지붕 병원아래 가까이 있습니다.
푸른창공을 향해 두 날개 활짝 펴고 비상하는 힘찬 에너지가 있었지만 둥지에 돌아와 지친 날개를 접고 휴식하며 깃털을 고르는 시간도 있습니다.
참새부리처럼 신비하게 뽀쪽 내밀고 일어나던 새싹의 부드럽고 연약한 유년이 있다면 어느새 색동 단풍으로 옷을 입고 낙엽이 되어 떠날 채비를 갖춘 잎새가 있습니다.
깨알 같은 마음을 실어 꼭꼭 눌러 우체통에 넣는 사랑의 손길도 있지만, 미소 지으며 우체부가 건네준 사랑의 답장을 두 손으로 꼭 쥐어 가슴에 품고 촛불 앞에 수도 없이 읽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함을 내밀고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하면 만난 첫 만남이 순간이 쌓여서 동행자가 되어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으로 함께하다가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을 바람이 찬 기운을 싣고 불어옵니다. 찬 바람에 주부들은 두툼한 옷을 찾아 내어옵니다.
지금은 허리가 휘어지게 매달린 저 알곡과 과일들도 이제 곧 정든 논밭을 떠날 채비를 시작합니다. 가을은 엄숙한 예식장입니다 마치 입구와 출구를 한 곳에 만든 주차장처럼 보내고 맞이하는 소중한 교차로에서 아직도 체온이 남아있는 계절의 손을 놓아줍니다.
가을 산으로 오르는 길가엔 성급한 낙엽이 서두르며 떨어져 날립니다. 벌레 먹고 찢겨진 상처받은 낙엽이 모습이 거룩한 투사처럼 엄숙하게 느껴집니다. 휘어진 가지의 등에 열린 무거운 여름을 내려놓고 자유를 누립니다. 서녁하늘 붉고 노란 노을을 배경으로 억새풀이 사선지어 기대인 식은 나무벤치에 조용히 앉아 봅니다. 그리고 아쉬움에 곧 떠나보내야 할 것 같은 그분의 남은 냄새에 가까이 코를 데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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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이동식
활처럼 기운 허리에
매달린
자식 같은 열매사이로
벌레 먹은 낙엽
바람에 흩날린다
문턱까지 찾아온 님에게
들켜 버린 게으름
거친 숨 몰아쉬며
산길 오르다
식어버린 벤치 위에
기대앉은 나그네의
무거워진 어깨위로
마른 억새꽃
가만히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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